01 바이탈이 무너진다?
“오늘 자로 대한민국에 소아청소년과라는 전문과는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 대한민국에서는 소아청소년과라는 학문이 소멸될 겁니다.” 지난 3월 29일,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연 ‘소아청소년과 폐과와 대국민 작별 인사’ 기자회견에서 임현택 회장이 한 말이다. 이는 개원 소아청소년과의원, 즉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소아과’의 결집 단체다. 폐과 선언의 원인은 ‘30년째 동결된 진료비로 인한 경영난, 일부 보호자의 의료소송 그리고 의료진에 대한 법원의 과중한 처벌’이라고 했다. 눈물의 기자회견 끝에 의사회는 “타 진료과목으로 전공을 바꿀 의사들을 곧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과를 지원하겠다는 의미로, 꽤나 구체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대한민국 의료는 왜 소아과부터 무너지고 있는가?’라는 글이 올라왔다. ‘블라인드’에서는 글이나 댓글 작성자의 직업이나 회사명을 표시한다. 작성자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소아과만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크게 보면 의료는 ‘바이탈’,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고 보험이 적용되는 의료 분야부터 무너질 거라고 했다. 바이탈은 일반적으로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를 포함해 내과, 외과, 흉부외과 등을 일컫는다.
작성자는 의료 시스템 자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의료는 일단 ‘저수가’를 기본으로 한다. 때문에 환자를 돌보면 돌볼수록 병원은 손해다. ‘바이탈’일수록 그렇다. 지금까지는 돈을 많이 받는 전문의가 아닌, 일명 ‘레지던트’라 불리는 전공의를 굴려서 유지해왔다. 그러나 저출산으로 소아 환자는 줄어들고, 소아과의 전공의 수도 반토막이 났다. 병원 입장에서는 소아과를 아예 없애버리는 게 이득이다. 그렇게 소아과를 시작으로 다른 바이탈과 역시 같은 방식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젊은 인구가 많아 건강보험 재정이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던 성장 시대에 정립된 의료제도가 인구성장의 거품이 꺼지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 인구 대비 의사 숫자가 많기에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추락할 일만 남은 하향 곡선이라고 덧붙였다.
‘의료 붕괴’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폐과 선언도 있었지만, 이에 앞서 대구에서 다친 10대가 응급실 빈자리를 찾아 재이송을 반복하다 사망한 사건이나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근무 중 뇌출혈을 일으켰지만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한 사건 등이 보도되며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이슈가 이어져왔던 만큼 블라인드의 해당 글은 ‘핫플’이 됐다. 대부분이 공감한다는 댓글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방문하는 우리 동네 소아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출산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늘 아이들로 가득했다. 뉴스에 종종 ‘소아과 오픈런’이 보도될 정도인데, 폐과는 조금 오버가 아닐까? 또 뉴스 속 (의사가 아닌) 전문가들은 대구 10대 사망이나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 모두 원인이 ‘인구 대비 의사 부족’이라고 했다. 블라인드 글의 주장과 대치됐다. 호기심이 동했다. 과연 의료가 무너지고 있는 게 맞는가?
02 더 많은 의사가 필요하다
2021년 기준, OECD 평균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는 3.7명이었고, 한국은 2.5명이었다. 꽤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건 한의사를 합친 수치다. 한의사를 빼면 2.0명으로 줄어든다.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의 반도 못 미치는 수치로, OECD 국가 중 꼴찌다. 게다가 그 적은 의사들이 다 서울에 몰려 있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단연 서울로 3.45명이었다. 각각 1.54명, 1.39명인 충남, 경북 지역과는 꽤 큰 차이가 났다.
블라인드 글 작성자는 “한국은 인구 대비 의사 숫자가 많다”고 했다. 해당 통계와 대치되는 주장이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근거는 있다. 의료 접근성과 이용률이 세계 최고라는 것이다. 어떤 지역이든 조그만 동네 병원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만원 이내의 저렴한 가격으로 전문의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또 의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의사를 늘리면 나중에는 의사 숫자가 인구 대비 너무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블라인드 글 작성자 및 의사 단체의 주장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강원도 삼척시에 거주하는 김남기 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10여 년 전 설 명절 당일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미취학이던 아들이 먹던 떡이 목에 걸렸다. 질식 직전까지 가 응급조치를 취했으나 아들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인근에서 가장 큰 병원이 위치한 강릉으로 이송됐으나, 해결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없기에 서울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귀경 행렬이 한창인 시간이었다. 한참이 지나 서울에 도착해서야 그의 아들은 겨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인데,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손이 떨려요. 지금은 더할걸요?”
김씨의 아들은 다행히 골든타임 내에 치료를 받았지만, 김씨의 말대로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많다. 한국인 7명 중 1명은 ‘의료취약지’에 거주한다. 의료취약지란 말 그대로, 병원이 없어 환자가 제대로 진료받기 어려운 곳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병원은 위에서 언급한 ‘조그만 동네 병원’이 아닌 종합병원이다. 결국 ‘좋은 의료 접근성’이란 위급하지 않은 경증 환자와 종합병원이 위치한 수도권 및 대도시 거주자에 국한되는 표현인 것이다. 게다가 저출산으로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의료 수요는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저출산은 고령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병원을 더 자주 찾기 마련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은 지난해 2035년이 되면 의사 숫자가 수요 대비 2만7232명 부족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발표했다.
03 총체적 난국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은 한 의사의 배부른 투정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해당 글의 작성자와 뉴스 속 의사 아닌 전문가의 주장이 일치한 점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바이탈, 그중에서도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외과, 응급의학과는 전공의 전문과목별 충원율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소아청소년과는 정원 203명에 지원자가 57명에 불과해 최하를 기록했다.
“기자님 같으면 가겠어요?” 이른바 ‘인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수능을 쳐 지방 의대에 입학한 이소정(가명) 씨가 그렇게 말한 뒤 머쓱하다는 듯 웃었다. “바이탈 선택해서 종합병원 계신 선생님들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드라마도 그런 분들을 다루잖아요.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렇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일까? 그래도 일반 직장인에 비해서는 많은 돈을 벌지 않냐고 묻자 이씨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워라밸이 가장 중요한데, 학교 다니다 보면 위에서 듣는 얘기가 있잖아요. 누구 선배 주 근무 시간 세 자릿수라더라, 하루에 서너 시간 잤다더라, 그런 것들. 보람차겠지만 저는 못 할 것 같아요.”
소아청소년과가 정원 203명에 지원자 57명을 기록할 때, 안과와 피부과, 성형외과 등의 지원자 수는 정원을 초과했다. 비교적 워라밸이 보장되고, 바이탈에 비해 수가로부터 자유로운 과다. 일도 편하고 돈도 많이 버니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종합병원 나오고 개원했을 때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었는데, 전과를 하고 나니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었죠.” 지방에서 통증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 최상기(가명)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종합병원 바이탈과에서 근무한 뒤 개인 병원을 차렸으나, 저출산으로 환자 수가 급감하자 ‘전과’라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돈이나 워라밸 때문만은 아니었고, 20년 넘게 똑같은 걸 했으니 좀 새로운 걸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는 몇 년간의 임상과 수련 끝에 성공적으로 진료과목을 바꿨고, 지금은 전보다 훨씬 적은 노동 시간으로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최씨는 의사가 부족한 곳은 동네 의원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제가 종합병원을 나온 지 15년 정도 됐는데, 그때도 제가 나오고 충원을 안 했어요. 서울은 이제서야 난리지만, 지방은 예전부터 그랬던 거죠. 전문의를 새로 고용하면 돈이 많이 나가는데, 환자는 없으니까.” 그는 자신도 종합병원을 떠났지만, 상황은 심각하다고 말했다. “원래는 동네 병원에 가장 초급 의사가 있고, 지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의가 종합병원에 있는 게 맞죠.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예요.” 그는 꼰대처럼 듣지는 말아달라며 ‘라떼’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대학 다니던 1980년대에는 전문의를 따는 게 당연했어요.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전문의를 안 딴대요. 근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전과하고 보니, 내 자식에게 바이탈 전문의를 하라고 추천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의 말대로 전문의 응시자 숫자는 점점 감소 중이다. 의대생 정원은 매년 전국 3058명이다. 2014년에는 3558명이 전문의 시험에 응시했다. 10여 년이 흐른 올해 전문의 시험 응시자는 의대생 정원 이하인 2861명으로 줄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700여 명이 감소했다. 게다가 전문의가 되기 위해 전공의 생활을 하다가 중도 이탈하는 인원도 다수다. 신 의원실이 공개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2018-2022 전공의 이탈률은 흉부외과가 14.1%, 외과가 13.0%였다. 1.3%인 피부과의 10배가 넘는다. 최씨는 아마 전문의 시험을 치지 않았거나 전공의 수련을 그만둔 이들 대부분이 페이닥터 또는 자신과 같은 ‘일반의 개원’으로 빠졌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만큼 종합병원에 들어가는 전공의 숫자는 줄어든다.
일반적인 경증 환자나 수도권 거주자에게는 아직까지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의료 제도에 위기가 닥친 건 맞았다. 의사 숫자는 부족한데, 그중에서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바이탈 지원자는 더더욱 부족하다. 돈도 워라밸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합병원 입장에서도 수가도 낮고 이용자도 적으니 바이탈에 전문의를 쓰는 게 손해다. 비교적 싸게 먹히는 전공의를 굴려야 하는데, 전공의 숫자마저 급감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04 이해 충돌
‘의료 붕괴’가 지속적인 이슈가 되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제안도 다양하게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의대 정원을 늘리라는 것이다. 현재 의대 정원은 3058명이다. 2006년 고정된 이래 변하지 않았다. 정원을 늘리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모두 의사 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허사로 돌아갔다. 이에 정원을 늘릴 수 없다면 지방의 의료 공백이 심각하니 학비 등을 지원하고 10여 년의 지역 근무를 의무화하는 ‘지역의사제’를 실시하자는 제안이나, 아예 의대 입학 때부터 과를 선택하도록 해 바이탈 기피 현상을 줄이자는 의견도 제기됐다.
“현실성 없는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의사들이 서울로 가는 게 돈 때문이면 지역의사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거든요. 환자도 없고 인프라도 없잖아요. 개인적으로 서울 집중 현상은 비단 의사뿐만 아니라 지금 젊은 세대 전반이 지방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어요.” 최씨의 말이다. 실제 서울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1900만원으로 17개 시도 가운데 가장 적다. 의사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경북과 충남은 2억원대 후반으로 전국 평균을 상회한다. 하지만 급여보다 중요한 건 안전성일 것이다. 비수도권 지역 중소 병원들의 최근 5년간 폐업률은 12.5%에 이른다.
“병원을 열어도 환자가 안 오면 말짱 꽝이지 않겠어요.” 현재 지방 의대에 다니고 있는 이씨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졸업 후에는 어떻게든 고향인 수도권으로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역의사제를 실시하더라도, 평생 그 지역에 살라고 강제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일정 기간 근무하라고 지정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럼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요? 근본적 문제 해결은 없이 사람을 욱여넣는다고 바뀌는 게 있을까요?” 이씨의 말이다.
입학 때부터 과를 선택해 바꿀 수 없도록 하는 식의 규제는 어떨까. “전문의 타이틀 버리고 일반의원을 연 사람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최씨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씨도 현실성 없는 의견이라고 봤다. “흉부외과 간 선배 누구는 지금 보톡스 놔주고 있고, 소아과 전공한 선배 누구는 머리 심어주고 있다, 이런 얘기 많이 듣거든요. 전문의까지 따도 그럴 수 있는 건데, 입학 때 정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보건복지부의 2020년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흉부외과 전문의가 전공을 살려 개원하는 경우는 18%에 불과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중 전문과목과 진료과목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20%에 달했다.
결국 현실성 있는 개선 방안은 의대 정원 확대뿐인 걸까. 의사 단체는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으니, 의대 정원을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의 노동력에 맞는 수가를 제공하면 되는 일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한국 의료제도는 ‘행위별 수가제’를 택하고 있다. 의사가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건강보험이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는 제도다. 의사들은 이 수가가 공평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바이탈과에서는 보통 인력을 갈아 넣는 수술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수술은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인 구조였단 말이죠. 하지만 장비를 써서 일하는 분야, 그러니까 검사나 영상은 수가가 높아요. 이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죠.” 최씨의 말이다.
단순하게, 바이탈과에 수가를 몰아줄 수는 없는 걸까? 최씨는 고개를 저었다. “재정은 한정돼 있고, 이미 받고 있던 수가를 재책정한다고 하면 높은 수가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죠. 각자 이익을 우선 생각하면 당연히 이해가 어려운 거고요.” 앞서 그는 지금 이전에 비해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의사들 돈도 많이 버는데 좀 내려놓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잘 알죠. 그런데 직장인들도 일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월급 깎는다고 하면 기분 어떻겠어요. 과하게 욕심을 부린다기보단,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견 조율이 쉽지 않은 걸로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결국 문제는 ‘돈’이다. 한국과 비슷하게 정부 주도의 건강보험제도를 갖추고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떨까? 일본의 의료 수가는 한국의 3배 이상이다. 또한 산부인과나 소아과 등 기피과에 대한 지원금도 높다. 다만 일본은 건강보험 국고 지원 비율이 한국의 2배 정도로 높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케이스를 참고해 국고 지원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으나, 재정이 한정된 상황에서 쉽게 풀릴 문제처럼 보이진 않는다.
05 마지막 기회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은 권역별 공공의대 신설을 주장하며 의대 정원을 최소 1000명 이상 증원해야 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의사 숫자가 늘어나야 ‘낙수효과’가 일어나 안과나 성형외과 같은 인기과가 아닌 바이탈과까지 의사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의사 단체는 정원을 확대해봐야 전문의를 포기하고서라도 인기과로 몰릴 테니 수가를 인상하는 것만이 의료제도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대응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 양쪽 끝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두고 지금의 논리로 서로의 말에 반박하다 보면 끝이 나지 않을 터였다. 의대 정원과 수가 인상, 그 가운데에서 의료 붕괴의 대비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5월 초 공개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수가가 낮아 늘 적자가 나고, 그 결과 병원이 인력을 가장 적게 쓰는 분야인 중환자실과 응급외상센터 등에 ‘사전 보상’ 형태의 지불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외상센터의 경우, 긴급 상황에 대비해 수술 가능한 의사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대기만으로는 수가가 책정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병원 입장에서는 인건비만 나가는 적자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예산을 줄이게 된다. 그 결과 ‘의료 붕괴’ 상황이 빚어졌다. 박 차관은 “팬데믹 당시 정부는 부족한 중환자실을 확보하기 위해 일단 병상을 비워두고, 아무런 행위가 없어도 돈을 줬다. 환자가 들어오면 추가로 지불했다. 이런 형태의 지불제도를 경험해봤으니 중환자실에 대한 지불 구조를 바꿔볼 만하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정부가 빈 병상을 미리 사두는 것으로, 중환자실이나 외상센터를 운영해도 흑자가 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바로 해결될 거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약간의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는 중환자실이나 외상센터 의사들이 적자의 늪에서 눈치를 볼 일이 줄어들고, 병원 입장에서도 사업을 축소할 명분이 사라진다.
이와 더불어 박 차관은 내년 4월 전까지 의대 모집정원 조정안을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부터 적용된다. 정확히 어느 정도 늘어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객관적 근거에 의해 부족한 수요를 채울 정도는 될 것’이라고 전했다.
박 차관은 “의대 정원 총수를 늘리면서 의료기관이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되게 수가 등 지불 구조를 고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투트랙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의료 붕괴를 어떻게든 막아내겠다는 의미다.
경제도, 인구도 고속 성장하던 시대에 세워져 유지될 수 있었던 한국의 의료제도는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며 각종 문제에 휩쓸리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와 의학계의 이해관계, 의사 개개인의 욕망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뒤섞여 있다. 복잡다단한 이 문제를 단번에 칼로 무 자르듯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는 걸 지켜볼 수만도 없다.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의료제도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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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