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보상과 ‘워 라벨’, 법적 분쟁 가능성 등의 이유로 필수의료 현장을 떠나는 의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에게는 새로운 선택지로 ‘개원’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대구파티마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응급실 뺑뺑이’로 인한 10대 사망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자 의료계가 공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으로 인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급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응급의학과 전공의도 급감해 ‘응급의료 대란’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터져 나온다.
응급의료 현장을 이탈하려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이들에게 ‘개원’이라는 선택지는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다른 임상진료과와 달리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주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 소속돼 응급실에 근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이미 우리나라 응급의학과 전문의 중 10% 이상은 개원가에서 의업을 수행하고 있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총 2181명으로 이 중 종합병원에 1387명, 상급종합병원에 455명이 근무하고 있고, 의원급의료기관에도 213명이나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한림대성심병원 교수)은 “실제로 개원가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300명이 넘는다”며 “지난 3~4년 사이에 근무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고 여러 사고까지 생기면서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불안감마저 더해져 응급실을 떠난 이들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지난 6월 23일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과 함께 대구파티마병원 전공의들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하고 있는 대구북부경찰서에 항의차 방문한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사진 오른쪽)
주목할 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의 경우 원래 있던 의료 현장을 떠나 다른 길을 택한다고 해서 다른 진료과 전문의들처럼 미용·성형이나 요양병원, 일반과 등을 택하는 게 아니라, 응급실을 떠나더라도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선택지로 ‘개원’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경증 응급환자를 동네의원에서 진료하는 ‘급성기클리닉’(urgent care clinic)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3~4년 사이에 이러한 급성기클리닉이 많이 생겼다.
지난 2016년 국내 첫 급성기클리닉으로 개원한 판교연세의원(원장 신형진)의 경우 작년에 대면진료클리닉 브랜드 EM365를 설립해 1년 만에 7호점까지 낼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응급실이 없는 영종도의 경우 이엠EM365의원 영종점이 24시간 진료를 하며 경증 응급환자들이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아 바다를 건너갈 일이 없도록 커버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급성기클리닉은 우리나라보다 의료 접근성이 높지 않은 외국에서 이미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형민 회장은 “미국 전역에 이런 급성기클리닉(ucc)이 최근 10년 사이에 약 1만개나 생겨 마치 편의점처럼 많이 보인다. 호주와 캐나다에도 ‘워크인클리닉(walk in clinic)’이라고 불리는 급성기클리닉이 많이 생겨 코로나19 환자의 약 70%를 소화하기도 했다”며 “개인의원은 예약을 해도 며칠이나 기다려야 하고 대형병원 응급실은 진료비가 비싸며 그나마 경증 응급환자들은 중증환자에 밀려 진료 순서도 한참 늦어지기 때문에 의원과 응급실의 중간 형태인 급성기클리닉에 대한 수요가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응급실 과밀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동네의원에서 직접 경증 응급환자들을 진료하는 ‘급성기클리닉’이 활성화되면 응급실 과밀화 해소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모아진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응급실이 410여 개나 있지만 응급의료 자원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형병원 응급센터로만 환자들이 몰리고 있다. 여기에 응급실에서 진료는 당연히 중증도순으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자신이 중증환자라고 주장하며 먼저 진료를 해달라며 의료진과 실랑이를 벌이는 경증환자들이 넘쳐나고 있고, 심지어 길거리에서 보호자 확인도 없이 데려온 ‘주취자들’까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응급실 특유의 모습이다.
그러나 급성기클리닉이 활성화되기 어려운 장벽은 결국 ‘수가’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급성기클리닉이 경증 응급환자들만 진료해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두드러기로 병원에 내원하면 미국의 경우 개인의원은 약 15만 원, 응급실은 약 50~100만 원의 진료비가 발생하지만 우리나라는 종별에 상관없이 약 1만4천 원이다. 이런 수가로는 야간이나 주말에도 운영하는 급성기클리닉이 유지되기 힘들다.
이형민 회장은 “급성기클리닉이 경증 응급환자들을 커버해 주면 그만큼 대형병원의 응급실은 중증 응급환자 진료에 집중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100명을 진료해도 수익이 나지 않아 통증클리닉, 도수치료, 요양병원 모델 등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급성기클리닉을 통해 날로 축소되는 전공의 지원율도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도 모아진다. 우리나라 대학병원에서 응급실 전문의를 충분히 채용할 수 없어 4~50대 교수들이 야간당직을 서고 있어 체력적 부담이 커 의료 현장을 이탈하기도 한다. 이는 곧 전공의 급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형민 회장은 “응급의학과는 체력적 부담이 큰 특성상 은퇴 시기가 빨라 미국의 경우 평균 48세에 은퇴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학병원에서 충분한 인력 고용이 어려워 5~60대 교수까지 야간당직을 서는 마당이지만 앞으로 급성기클리닉이 활성화돼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개원을 하고 잘 살 수 있게 되면 전공의 지원율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급성기클리닉이 애초 기대했던 역할인 경증 응급환자 진료만 해서도 충분히 수익을 내며 운영이 가능해지려면 관련 수가 책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병원에서는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진료할 경우 ‘응급의학과 전문의 진찰료’가 가산되고, 비응급환자의 경우 ‘응급의료관리료’가 종별에 따라 차등 부과되고 있다.
이형민 회장은 “급성기클리닉에서 경증 응급환자를 진료했을 때에도 ‘응급의료관리료’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야간이나 주말 진료의 경우 소아청소년과의 ‘달빛어린이병원’과 마찬가지로 추가 인건비 지원이 필요하다”며 “앞으로 정부의 응급의료체계 개편 과정에서 이러한 제안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응급의학과에서는 ‘한국형 급성기클리닉’ 운영 모델을 도입할 것을 약 10여 년 전부터 주장했고 이에 보건복지부 관계자들도 긍정적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에 응급의학계가 직접 나서서 ‘급성기클리닉’의 운영 시범모델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형민 회장은 “오는 7월 16일 열리는 ‘2023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학술대회 및 정기총회’에서 급성기클리닉의 수익 운영 모델을 선보여 응급의학 전문의가 개원을 해서도 계속 전문가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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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의사신문(http://www.doctor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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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