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의사에 '멱살' 대신 '소장'…"배상금 올리려 민·형사 세트 소송"
의료변호사협회 황다연 위원장 "세트 소송 더 늘 것" '환자 보상보험’ 도입 제안…“공적 자금으로 무과실 보장”
법조계에서는 의료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 배상을 받는 ‘과실 책임주의’에서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료 사고에 대한 신속한 피해자 구제가 가능하도록 공적 자금으로 보상해주는 ‘보상 책임주의’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청년의사).
응급실 의사들에게 ‘멱살’ 대신 소장이 날아들고 있다. 민사소송뿐만 아니다. 형사 고소가 ‘세트’ 청구된다. 환자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초를 다투던 응급실 의사들이 법정에서 다투고 있다. 무과실 입증을 위한 싸움이 길어질수록 소송비용도 늘어난다.
정당한 사유 없이 병원이 응급환자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한 정부 정책으로 인해 응급실 의사를 대상으로 ‘세트 소송’이 더 늘어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응급실을 떠나고 있다.
법조계도 법적 보호 장치 없는 소신진료는 유효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의료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 배상을 받는 ‘과실 책임주의’에서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료 사고에 대한 신속한 피해자 구제가 가능하도록 공적 자금으로 보상해주는 ‘보상 책임주의’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의료변호사협회 황다연 대외협력위원장은 26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23 대한응급의학회 추계학술대회’ 응급의료정책 토론회에서 최근 판례를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걸어서 응급실 온 환자 이송 중 심정지도 '주의의무 위반' 판결
황 위원장이 소개한 판례는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A병원 응급실을 내원한 고혈압 환자가 이송 과정에서 심정지를 일으킨 사건이다.
A병원은 환자를 검사한 결과 적절한 처치가 이뤄지기 곤란하다고 판단, 이송을 결정했다. 당시 환자는 스스로 걸어서 응급실을 내원했으며 이송 조치가 내려졌을 때도 택시를 이용하겠다고 했다.
담당 의사가 구급차를 불렀으나 출동한 사설구급차에는 응급구조사가 없어 환자만 태워 보냈다. 45~50분 정도 지나 B병원에 도착했을 때 환자는 심정지 상태였다. B병원 의료진의 응급 처치로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21일 뒤 끝내 사망했다.
유족은 A병원 응급실 의사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법원은 구급차 이송 시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 의료진이 타야 하지만 이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A병원 응급실 의사가 ‘업무상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유족 측에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장에서는 병원이 응급환자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응급실 의료진에게 책임을 묻는 이같은 일들이 더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황 위원장은 “응급실은 이미 포화 상태라 중환자가 전원 됐을 때 업무상 주의의무를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느냐하는 문제가 생긴다”라며 “(법원에서는) 환자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이를 지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우리나라는 과실 책임주의가 근본적으로 깔려 있다. 환자가 사망하면 가족이 이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고 싶어 한다”며 “당연한 루틴처럼 돼 버렸다. 보통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동시에 형사 고소한다. 민사만 제기했을 때 보다 손해배상 액수가 커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 위원장은 “개인적 호의나 양심에 의지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길 바라는 건 50년 전 이야기”라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나 패러다임이 깨지지 않는 이상 필수의료 과가 위험에 처할 현실에서 벗어나기는 사실상 힘들다”고도 했다.
황 위원장은 “장기간 수사나 소송을 통해 환자 쪽과 의사는 과실 여부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힘들어지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면서 “피해 회복이 지연되고 필수의료 기피 현상에 이어 의료진 부족이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과실 책임주의’→‘보상 책임주의’ 패러다임 변화 必
황 위원장은 의료 사고에 대한 ‘환자 보상보험’ 국내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환자 보상보험은 스웨덴, 핀란드,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등에서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모델이 뉴질랜드의 무과실 사고보상법(Accident Compensation Act)이다. 환자 피해에 대해 소송 대신 공적 자금을 지원해 무과실로 보장해주는 제도다.
특히 보건과 장애위원회법(Health and Disability Commissioner Act)에 따라 독립적인 감시기관인 보건과 장애위원회(Health and Disability Commissioner)가 의료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환자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황 위원장은 “해당 국가들에서는 의료진이나 의료기관 과실 여부에 상관없이 의료 사고에 대해 피해를 보상하고 있는 환자 보상보험을 시행하고 있다”며 “신속한 피해자 구제가 가능하고 의료분쟁 관련 소송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단순 의료사고만 대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 중 발생한 손해에 대해 보상하는 법이다. 의료사고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사가 고의로 환자에게 해를 입히겠나. 의료사고에 대해서도 소송 대신 공적 자금을 지원해 피해 보상을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황 위원장은 “진짜 중과실이고 계속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의사라면 문제 여부는 독립적인 감시기관인 보건과 장애위원회가 책임을 물어 환자권리를 보호하고 있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 고소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환자 권익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했다.
황 위원장은 “보상 책임주의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특별한 경우 위원회에서 엄격하게 나쁜 사례는 솎아 낸다면 오히려 환자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내용”이라며 “국민 공감을 얻어가며 주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 재정 문제는 다음 스텝”이라고도 했다.
출처 : 청년의사(http://www.docdocdo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