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증원을 추진 중인 정부가 의료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정부는 2006년 이후 3058명으로 머물러 있는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기본 방침은 세워놓은 상태. 특히 지방에 있는 입학정원 50명 이하 ‘미니 의대’를 중심으로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의료체계를 보완하지 않고 증원만 해서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의료계의 입장으로, ‘수가(국가가 정한 의료 서비스 가격)부터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의대협회)는 지난 10월 27일 입장문을 통해 “의사 증원은 필수의료 붕괴나 지역 의료 공백 해소를 위한 유일한 대책이 될 수 없다”면서 “이를 위한 수가 정책, 법적 보호 강화 등 근본적인 정책이 반드시 선행·동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대한의사협회(의협) 역시 “사안의 본질은 낮은 의료 수가”라며 당장 수가부터 올리라고 요구했다.
지난 11월 8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료 현안 관련 병원계 간담회에서 정부는 의료계의 목소리를 청취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특성별 6개 병원단체 대표 대부분도 의대 증원을 환영한다면서 역시 ‘의료수가 보완’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필수의료 분야의 ‘수가 인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바이탈과(환자 생명과 직결된 의료 분야)들의 수가가 너무 낮아 의사들이 기피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의료비용 체계는 ‘행위별 수가제’가 많다. 진료, 검사, 수술 등 의사들이 제공하는 ‘행위’에 따라 가격을 매겨 건강보험(건보)에서 지불하는 제도다. 하지만 현장 의사들은 형평성 있게, 합리적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검체나 영상 등 장비가 일하는 분야의 보상률은 높고, 사람의 노동을 갈아넣는 고도의 수술 행위 수가는 너무 낮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대형병원 필수과에 의사들이 지원하게끔 하려면, 대학병원에서 필수의료 의사들의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지원하는 수가 인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온콜(병원 밖 야간 대기) 수당, 당직 수당 인상 등이 특히 거론된다.
지난 10월 26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는 ‘소아필수의료 지원 대책’으로 300억원 지원을 의결했다. 2021년 기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등록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6000명을 대입해 계산해 본다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인에게 월 매출 41만7000원을 보상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저수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아과와 고난이도 수술로 의료 소송 등의 위험에 처한 외과가 결합된 소아외과 입장에서 42만원 정도의 인상 수가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들 역시 정부에서 안전한 분만환경을 조성하고자 마련한 ‘분만수가 인상’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현 수준의 인상으로는 분만 의료기관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정부는 산부인과 분만 수가 개선에 연 2600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추가 투입키로 결정한 상태다.
“특정과 수가 올리면 다른 과 깎이는 구조”
수가를 어느 쪽으로, 어떻게 ‘우선 분배’해야 하는지도 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아과 전문의 A씨는 “쓸 수 있는 돈(건강보험료 재정)은 고정돼 있고, 우리(진료과들) 안에서 분배해서 지원받는 상황”이라며 “어느 전공도 양보하지 않고 어렵다고 하는데 별도의 추가 지원이 아닌 이상 내분만 생길 것”이라고 전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의료보험 지정제로 모든 의료기관이 국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진료한다. 국내 의료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정한 수가 이상을 받을 수가 없다. 이와 관련 이형민 한림대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병원을 운영해야 하는데 보험수가 이상의 돈을 받지 못하니 보험수가만 쳐다보면서 유지관리를 위한 비용 자체를 계산하는 상황이 왔다. 응급실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전국에 약 400개 정도 되는 응급실 중 약 50~100개는 자생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예를 들어 심폐소생술을 30분 실행하는 비용은 약 5만원 정도다. 이에 대한 가치를 생각을 했을 때 ‘부족하다 올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문제는 이 수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를 깎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험 구조 자체가 내가 있는 과의 수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과에서 손해를 보고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보건의료행정 전문가는 “수가 구조를 재조정해야 한다. 상대 가치를 너무 낮게 잡아놨기 때문에 원가보전적 측면에서 의사의 행위료가 굉장히 낮게 책정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원가 조사는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이번에 논의하는 수가 지원은 별도로 건보 재정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필수의료 관련 분야는 지속적으로 보상을 강화하고 지원할 것”이라고 전했다.
수가 올라간 특정과 전문의 개원의로 빠진다
의료계는 수가 구조를 방치한 채 수가 인상에 나서면, 오히려 인력 시스템의 왜곡을 심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필수과 지원 명목으로 특정 수가를 인상하면 수가가 오른 과의 대형병원 전문의가 개원의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B교수는 “사실 현재 우리나라 의료의 이용 행태 자체가 너무 과도하다”면서 “싸고 질 좋고 국민들이 원하는 의료는 사실 없다. 누구나 병원에 가면 30분씩 진료받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인원 부족 등으로) 의사 1명당 100명씩은 상대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앞서의 이 교수는 “국가에서 돈을 내는 공공의료가 발달한 유럽의 경우 예약하면 한 달씩 기다려야 한다. 결국은 나라에서 돈을 내는 의료를 만들어놨더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됐다. 우리는 민간의료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을 잡고 나라에서 확보하려 하고 어떻게든지 싸고 양질의 의료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구조 자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언젠가는 망가지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진실을 고백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값이 싸면서도 좋은 의료, 사고 안 나고 양질의 진료를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건보료를 올리는 것도 쉽지않다.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C씨는 “지금의 체계에서도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데 누가 건보료 인상을 좋아할까 싶다”면서 “의료체계가 무너진다는 의사들의 주장은 너무 먼 이야기로도 보인다”고 말했다. D씨 역시 “전기요금 1% 오르는 것에도 반대가 많은데 건보료까지 올리면 당연히 탐탁지 않다”면서 “국민 한 사람당 건보료, 손해보험 같은 개인 보험료 등으로 이미 월 15만원씩 나가는데 좋아할 사람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건보료 인상은 내년의 경우 다른 물가 사정을 고려해 동결됐지만, 재정 등 여러 부분을 장기적으로 보고 주의 깊게 주시하면서 내후년에 어떻게 할지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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