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심평의학→사법의학…한국 의료 '위기'
과도한 삭감 이어 민형사 판결 '노이로제' 호소…"필수의료 붕괴 주원인"
대한민국 의료가 소위 ‘심평의학’에 이어 ‘사법의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역대급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의료행위에 대한 법봉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면서 의사들 사이에서는 의학 교과서가 아닌 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진료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그동안 의료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급여비 삭감으로 적잖은 고충을 겪어 왔다. 심평원의 심사기준이 교과서 진료와 괴리가 커 ‘심평의학’이라는 냉소적 표현까지 생겨났다.
예를 들면 어깨와 무릎이 아파 병원에서 동시에 물리치료를 받더라도 한 곳만 보험을 인정한다든지, 모든 병세와 병명을 무시하고 근육주사는 한 달에 3번만 인정하는 식이다.
의사들은 불명확한 심사기준과 투명하지 않은 심사과정을 지적할 때마다 ‘심평의학’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심사기관 스스로도 관행 타파를 다짐할 정도로 의료계에서는 일반명사가 됐다.
최근에는 경향심사, 분석심사 등 심평원 스스로 ‘심평의학’ 프레임을 벗어던지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의사들에게 ‘삭감’은 여전히 불편한 단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의사들은 ‘삭감’ 보다 ‘판결’에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의료사고 시시비비는 물론 첨예한 직역 갈등까지 사법부 판단에 좌우되는 사례가 빈번해진 탓이다.
최근 법봉의 향배에 따라 의료계 전체가 휘청되는 상황이 잇따라 연출되면서 법원이 의료계 주요 이슈 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특히 의료사고 관련 민사소송이 주를 이루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굵직한 의료현안 최종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지면서 판결에 따라 의료계가 일희일비하는 상황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의료계와 한의계가 오랜기간 신경전을 벌여온 한의사 초음파 기기 사용 여부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의사들의 공분을 샀고,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 판결이 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사법부에서는 직역 갈등 관련 판결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한의사 신속항원검사 판결이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1월 대한한의사협회가 질병관리청을 상대로 제기한 ‘코로나19 신속항원검사 관련 행정소송’ 1심에서 한의계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질병관리청 행위는 명백한 잘못이며, 한의사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인정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등을 인용해 한의사 전문가용 신속항원검사(RAT)는 합법이라고 판시했다.
이미 공중보건한의사가 보건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위한 검체 채취 업무를 수행해 왔던 만큼 한의사의 전문가용 신속항원검사는 가능하다는 게 법원의 판결이었다.
해당 판결 이후 한의사협회는 전국 한의원 및 한방병원에 ‘한의원에서 독감,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라’는 내용이 담긴 포스터를 제작, 배포하며 홍보전에 나섰다.
무소불위 영향력, 직능 업무범위도 결정
굵직한 의료 현안, 법봉 향배에 일희일비
일명 ‘사법의학’은 가뜩이나 힘겨운 대한민국 필수의료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에 대한 실형 및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면서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의 부담감을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장폐색 의심환자 수술 시기 조절과 악화 책임을 물어 외과의사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8월 의학적 판단에 따라 수술을 늦춘 의사에게 금고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최종 확정했다.
이에 대해 대한외과의사회는 “해당 판결로 마음 놓고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의사는 사라졌다”며 “향후 발생될 모든 파탄의 책임은 오롯이 법원에 있다”라고 힐난했다.
1년 차 레지던트 시절 대동맥박리를 진단하지 못해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기소된 응급의학과 의사가 최종심에서도 유죄를 선고 받아 면허취소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이번 판결이 우리나라 응급의료의 붕괴와 응급의료 종사자들의 이탈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대한응급의학과의사회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와 좌절까지 느낀다”며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응급의료에 대한 사망 선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도한 배상 판결 역시 필수의료 몰락을 부치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에만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사고 12억원, 폐암 치료 지연 17억원, 심장수술 후 영구 발달 장애 후유증 9억원 등 거액의 배상 판결이 잇따랐다.
신생아를 바닥에 떨어뜨려 의식 불명에 빠지게 한 ‘아영이 사건’의 경우 병원 측이 부모에게 손해배상 및 위자료 명목으로 9억4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또한 응급실 내원 환자의 호흡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기관삽관을 시도한 의료진에 대해서도 5억7000만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모두 의사 및 의료기관에게 뼈아픈 판결이다.
‘억’ 소리 나는 배상금, 의사들 부담 가중
의료사고 징벌적 분위기에 등 떠밀리는 의사들
‘사법의학’ 중 일부 재판부의 의료진 무과실 판결은 그나마 위안거리다.
대구지방법원은 최근 간 이식수술 후 사망한 환자의 유가족이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의료진에게 과실이 없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유가족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의료진이 1차 수술 과정이나 경과관찰 과정에서 주의의무나 설명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산부인과 분만사고에 대한 의료진 과실 불인정 판결도 나왔다.
대구고등법원은 최근 의료진 과실로 신생아가 뇌손상이 생겼다며 산부인과 전문의, 병원에 10억원대 손해배상을 제기한 항소심에서 의료진의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환자 가족이 ‘신생아 뇌손상 원인이 의료진 과실에 있다’며 분만의와 병원장을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까지 처벌과 배상을 강조하는 ‘징벌적’ 사회 분위기가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을 병원 밖으로 떠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대가 형성되기는 했다.
‘무과실 의료사고 관련 사법리스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료계 요구가 커졌고 윤석열 대통령도 힘을 실으며 지난해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지난해 12월 분만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보상 재원을 국가가 전액 부담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필수의료 분야에서 발생한 무과실 의료사고에 대해 의료인의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도록 한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 제정안은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외과 원로 교수는 “의료행위의 시시비비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전문가인 의료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사법의학이 필수의료 붕괴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라고 힐난했다.
이어 “사법 리스크 해소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의 이탈과 기피는 점차 심화될 것”이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라고 덧붙였다.